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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김상우 시인의 첫 시집 _ 세종마루시선 007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김상우 시인의 첫 시집  _ 세종마루시선 007

김상우[저]

대전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대학을 마쳤다. 노동야학과 출판사를 하다가 서른 살 때 산으로 가출했다. 조르바같은 스승을 만나 여러 해를 함께 여행 다녔다. 인간은 사랑의 현존이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지금도 순례 중이다. 2019년《세종시마루》 신인상을 받았다.


책소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김상우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시를 공부해온 40여 년의 세월이 잘 함축되어 있다. 그가 자신의 시에서 지난 40여 년 동안 화두로 삼아온 것은 ‘사랑’이다. “한 가지만 사랑했다/나눌 수 없어 그쪽만 바라보았다/개복숭아꽃이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는 밤에는/자꾸 눈물이 났다”(「단 한 가지의 사랑」)라고 노래해온 것이 김상우 시인이기 때문이다.
본래 ‘사랑’은 화합의 정신, 일치의 정신, 조화의 정신, 균형의 정신을 토대로 하게 마련이다. 하나됨의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랑’을 그가 자신의 시적 화두로 삼은 것은 아마도 실제의 체험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사랑’이라는 화두의 범주가 남녀 간의 그것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남녀 간의 관계를 뛰어넘어 나와 나, 나와 너, 나와 그, 나와 자연, 나와 신 등의 관계를 충분히 포괄한다. “당신을 생각하는 것은/가깝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나를 바라보는 일이”(「흘러가는 가슴」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가 화두로 삼는 ‘사랑’의 범주가 이처럼 넓어지는 것은 “서른셋 예수의 나이를 한참 지나” “나와 다른 것도 사랑하게”(「홍이에게」) 되었다고 노래하는 시에 의해서도 확인이 된다. 사랑의 범주가 이처럼 확대되는 동안 그것의 안에 아내, 자식, 누이, 부모 등까지 포함되었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급기야는 허공 혹은 허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까지 깊이 사랑해온 사람이 시인 김상우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텅 빈 것들이 모여 신나게”(「연산역 바람개비」) 도는 것까지도 따듯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온 것이 그라는 것이다.

목차

제1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단 한 가지의 사랑/흘러가는 가슴/꽃 같은/홍이에게/비의 노래/겨울 편지/봄날/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만추/숨은 꽃 -떠남에 대하여/꿈길/사월/그 여자/찔레꽃

제2부 강물은 다시 흐른다
엄마 손/한식寒食/역전 평화상회/5월에/그들만의 꽃/전라도 여자/희망이란 이름의 담배/코로나 기일/걸레의 꿈/겨울 학하동/강물은 다시 흐른다/웃는 돌/삶/화양연화花樣年華/손톱을 깍으며/싸파의 봄/반곡리 이장

제3부 반곡에 오면
시를 잊었습니다/길의 노래/대평리에서 -유미에게/논두렁 물/반곡리에 오면/진호에게/눈물에 대하여/꽃 피는 하늘 -혜랑에게/여름 연가/연산역 바람개비/달의 소리/참회/12월/겨울 눈/학가산/강원도의 힘/풍장風葬

제4부 영혼 속의 영혼
부질없는 그대에게/서시序詩/왕의 가을/내 길의 씨앗 -슬픔에게/섬/사랑한다면/오늘 하루/지금 여기/바람의 넋/오월의 비/길 속의 길 -광비에게/왼손의 노래/영혼 속의 영혼/현해탄/산행

본문중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
그 품에 안기면 한없이 부서져
저를 다 내주고도 흐르고 흐르는
물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보고 싶었어
하나도 남지 않아도
가슴 끝까지 다 타버려도
지금 여기만 바라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에나 닿아도 꽃이 피는 사람
꽃 같은, 사랑 같은 사람.
-「꽃 같은」 전문


있는 듯 없는 듯 삽니다
밤새 얼었다 녹았다
혼자 하늘 향해 두 눈 치켜뜬 산속 황태처럼
꿋꿋이 겨울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당신 계신 곳까지 못 갈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이제 하지 않으렵니다
마음가지에 꽃 피면 어디라도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뿐인 세상에 마음 하나 지키기 어려워
겨울 아침 소소한 청수 한잔 올립니다
당신 있는 하늘처럼 저 맑은 물이 당신인 듯합니다
그 위에 물처럼 흘러갈 이름 석 자를 써보았습니다
그립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밤새 불었다 쉬었다 가는 바람인 듯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습니다.
-「겨울 편지」 전문


역전시장 평화상회를 그만두던 날
엄마는 낡은 상처투성이 마늘 바가지부터 챙겼다
그녀만큼이나 나이 들고 야윈 바가지를 짐 보따리에 넣으며
사월 끝인데도 자꾸 코끝이 시리고 눈이 매웠다

이따금 역전 대합실에 가면 그렇게 눈이 아파왔다
아무렇지 않게 가버린 한 여자와 혼자 돌아온 사내가 거기 서 있었고
그 스물의 봄날 이후 나는 예외처럼 살았다
예외였기에 자유로웠고

때 낀 달력에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빨간 미수금들
2016년 4월 8일 은행동 노점 아줌마 고구마 4박스 배달
파장사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간 천변 슬레이트 집
홍등 아래서 아줌마는 울고 있었다
떡잎만 한 아이들을 두고 간 아저씨한테 재배를 드리고
벚꽃이 눈처럼 떨어지는 천변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역전시장 평화상회 바가지를 씻다 보면
그 깊은 곳에서 너무 많은 길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또 만나는
삶이 보이고
아무렇지 않게 떠나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야 하는 역전시장

사랑은 예외가 없다고 길이 말했다.
-「역전 평화상회」 전문


텅 빈 것들이 모여 신나게 돈다
흰 아이가, 노란 아이가, 파란 아이가
바람이 까르르 웃으며
은행나무 위로 올라간다
햇살이 어흥, 하고 소리치면
첫차를 기다리는 절뚝배기 할배도, 노점상 강씨 아줌마도, 철도 계약직 이 양도, 평화상회 김 씨도
다 같이 돈다 텅텅 비어
통근 열차도 텅 비어가는데
텅 빈 사람들이 모여
텅텅 신나게 신나게 돈다.
-「연산역 바람개비」 전문


전화가 이주일째나 불통인 그녀는 때론 말이 없어서 차라리 평안했다
그날도 삶은 스스로 만든 굴레라고
담쟁이넝쿨이 내게 말했다
저녁에는 혼자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취생몽사를 마셨다
거절할 것을 안다면 먼저 돌아선다는 무사 서독*의 말은
천년이 지난 오늘도 좋은 약이다

노천 카페 ‘사막’에는 이른 술을 마시는 사내와
늦가을 구절초 같은 여자가 여전히 콜라를 마시고
벌써 세 번째나 분갑을 열어보던 유부녀가 길 끝을 향해
한 점 꽃잎처럼 손을 흔들었다

누구는 사랑을 위해 일생을 기다린다고 했다
일생을 잊기 위해 살다 간 사람도 있다

사랑받고 싶었던 날
부치지 않을 편지를 썼다
가늠할 수 없는 날씨처럼 기침이 아무 때나 나왔지만
나는 묵은 가을 잠바를 입고 봄비를 맞았다
삶은 차선次善이 없다고 봄비가 말했다

다시 산행을 시작한 날
사막의 끝이 보이는 곳에서 살아 있음은 또 다른 침묵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살아갈 몫은 있고
잊기 위해 때로는 전부를 기억해야만 했다
이따금 살기 위해 밥을 먹었다.

* 서독: 영화 ‘동사서독’에 나오는 무사 이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전문


추천사

 사랑이 많은 사람,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보기에 그러한 사람은 잘 참는 사람, 잘 견디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시⌜비의 노래⌟에서 그가 말하는 "내일이면 아마도 깊고 푸른 바다로 떠나"야 할 사람을 따뜻하게 떠나보내는 사람 말이다. "그리움 사이에 서 있기 힘"들더라도 잘 참고 견디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리라. 잘 참고 잘 견딘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으로부터 떠난 사람을 아주 다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붉은 가지를 치며 또 다른 사랑으로 뻗어가"더라도 "내내 당신을 기억"(⌜홍이에게⌟)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시에는 '당신'으로 표상되는 수많은 사랑의 대상이 등장한다. 사랑이 많고 풍성한 사람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많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랑의 대상이 이른바 '연인'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겉으로 사랑하는 남녀간으로 읽히더라도 속으로는 그렇지않게 읽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의 시에 나오는 사랑하는 '당신'이 아버지일 수도 어머니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의 시에서 저 자신의 현존을 발견하고, 저 자신의 현존에 대해 통찰하는 일은 오래지 않아 타자의 현존을 발견하고, 타자의 현존을 통찰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은봉 (시인,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대전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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